바로 뒤에서 화장의식을 하고 있는데도, 아이들은 즐겁게 물놀이를 했다.
파슈파티 사원의 화장터

택시를 타고 파슈파티 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화장터와 힌두사원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간 이유는 힌두사원을 보기위해서 보다 화장터를 보기 위해서였다. 인도 바라나시에서는 매일같이 볼 수 있는 화장의식, 하지만 바라나시에 가기 전에 네팔과 인도의 차이를 알기위해서 또, 화장의식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였다.

성스러운 바그마티 강을 두고 오른쪽에서는 장작불에 무엇인가가 타고 있었고, 건너편에서는 그것을 지켜보는 관광객들이 있었다. 다행이게도 내가 갔을 때는 시신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고 불꽃만 볼 수 있었다. 처음부터 시신이 타는 장면을 보면 충격적일 것 같아 내심 불안했는데 다행이었다. 불이 타는 곳 가까이에 가보았다. 불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불을 지켜보고 있었고, 다 탄 장작을 강물로 밀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화장시켰다고는 믿겨지지 않을정도로 사람들의 표정이 덤덤했고, 눈물하나 흘리는 사람 없었다. 그리고 한 곳에는 장작을 침대모양으로 쌓아둔 곳이 있었는데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것으로 보아 금방 화장을 할 것 같았다. 

강변 한쪽 귀퉁이에 앉아있다가 앰블런스가 화장장 방면으로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보았다. 여기는 화장이 진행이되든 안되든간에 화장터 옆으로 지나는 행인들이 있었고 심지어 ‘구경꾼’들도 있었다. 강 건너편의 외국인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여기서 지켜본다고 해서, 화장과 관련이 없다고 해서 그러지말라고 말리는 사람 하나없었다. 그래서 화장이 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 

장례의식을 지켜본다는 것. 당사자는 슬픔에 잠겨서 고인을 저승으로 보내는데 남들이 와서 본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 행동일 것이다. 나는 한국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더 그렇게 느꼈다. 장례식을 치르고 있는데 외국인이 와서 지켜본다면 어떤기분이겠는가. 하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기도도하고, 고인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엇인가 배움을 얻지않을까, 아니 가르침을 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장중한 마음으로 곁에서 지켜보기로 했다.

화장터 앞인데도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그들의 시간을 보냈다.
화장터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다리에서는 관광객들이 화장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네팔사람도 많았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았다.

장작 주변에는 20명가량 되는 남자들이 모여있었다. 여성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네팔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낮다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앰블런스가 도착했고 고인을 몇명의 장정들이 들어내렸다. 고인은 비닐, 흰색천, 오렌지색 천으로 한겹씩 감겨져 있었고 성스러운 붉은색 가루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또다시 몇명의 장정들이 고인을 들고 강가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발부분을 벗기고 얼굴부분을 벗겨서 강물로 씻었다. 아마도 마지막 가시는 길에 성스러운 물로 목욕을 시키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장작이 잘 탈 수 있도록 짚더미를 장작 여기저기에 올려놓고, 봉지에 담긴 버터를 뜯고 잘게 쪼게어 구석구석 뿌렸다.

강가에서 고인을 장작으로 데려왔는데, 장작둘레를 세바퀴 돌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5명쯤 되는 남자들이 짚더미를 각각 들고 앞사람부터 불을 붙이고는 장작둘레를 돌면서 뒷사람에게 불을 전달해 나갔다. 불이 제일 뒷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때쯤 고인에게 불을 붙였다. 장작 아래, 위, 옆 할 것 없이 골고루 붙였다. 짚더미에 옮겨붙은 불은 금방 활활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불은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시들해지고 다시 몇더미의 짚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그리고는 두꺼운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인은 장작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하자 감겨져 있었던 오렌지색 천과 흰색천이 불에 타 없어져 버려 노골적으로 노출되었다. 특히 팔은 불에 타기 시작하자 비스듬하게 벌어지며 들어올려졌는데 불에 벌어진 살갗내부가 그대로 들어났다. 또, 혈액이 몸에서 빠져나오며 불을 죽이는 소리가 치익~치익~하며 났는데 죽어있으면서도 의식이 있는 듯 불을 끄려고 하는 듯 보였다. 뱃가죽이 불에 타며 부풀어오르다 못해 안에 있던 내장들을 쏟아냈는데 결국, 보다못한 사람들이 짚더미를 고인 위에 올려 몸을 가렸다.

화장의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주변에 사는 주민들, 지나가는 행인들이 너무나 덤덤하게 그 의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는 눈길한번 안주고 아낙들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애기들은 발가벗고 수영을 했다. 그 지역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다소 놀랐다. 한국같았으면 근처에 오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사원 가까이에 화장터가 있었다면 사원에 발길은 뚝 끊겼을 것이다.

불은 고인을 더 높은 하늘로 보내주려는 듯 점점 더 강해지며 높이 타올랐다. 열기가 강해져 나역시도 한발 물러섰고, 고인의 흔적은 점점사라지고 있었다. 불이 타고 있는 중에 몇몇 사람들은 정수리에 조금의 머리만 남기고 머리카락을 면도칼로 빡빡밀었다. 그러고 보니 그 머리를 깎는 사람들은 얼굴생김새가 매우 닮아있었고, 가족인 것 같았다. 

한국 장례만 생각해서 가족이 있었다면 펑펑 울었을 거라 생각되어져 가족은 없는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머리를 깎는 그 사람들이 가족일거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고, 마침 지나가던 한국사람에게서 머리를 깎는 사람들이 상주라고 얘길 들었다. 머리를 깎는 것은 아무래도 저승으로 가는 사람에게 외롭지 말라고, 몸의 일부라도 함께 보내기 위해 깎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수리에 조금씩 머리카락을 남겨두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일종의 싹의 의미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시작전에 꽃을 뿌리며 저승길에서의 축복을 바라거나 거의 다 탄 재 위에 쌀을 뿌리며 가시는 길 배고프지 않게 하는 등 여러가지 의식이 있었다.

화장의식을 치르던 사람들이 덤덤하고 무표정하여 가족일거라는 생각을 하지못했는데,, 가족이라니. 가족이라고 알고 난 후에 그들의 표정을 보니, 무덤덤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참고 있는 듯 했다. 막내아들로 보이는 가장 어린사람은 의식 내내 고개를 숙이고 울지 않았는데, 울고 있지 않은 얼굴에서도 큰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내가 지켜보았던 화장. 상주들은 화장의식을 마치고 머리를 밀었다.

총 6명이 머리를 깎았다. 모두 자식같아 보였고 닮아있는 모양이 형제같았다. 고인의 신체는 그렇게 크지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모친인 것 같았다. 그들 모두 모친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한국과는 많이 달라 다소 놀랐다. 죽음을 자연의 순리대로, 갈 곳을 간 것 뿐이라고, 또한 이곳사람들에 믿음에 따르면, 죽은 사람은 환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런 것 같았다.

4시간에 걸쳐 불은 계속 탔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는 남김없이 연기가 되고, 재가 되어 공기중으로, 강물로 그리고 원숭이의 입으로, 그리고 우리들의 코로 사라졌다. 앰블런스에서 내려졌던 그들의 어머니는 흔적이 없었다. 아들들이 다 탄 장작을 강물로 떠다미는 중에 자세히 보았지만 ‘인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단단한 뼈마져도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타버린 후에는 가족들의 조용한 슬픔과 보이지 않는 그리움만 남기고 아무것도 남지않았다.

죽으면 그렇게 아무것도 남기지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던가! 있던 것이 활활타오르는 불과 함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가족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추억으로, 기억으로 남겨져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있는데 육신은 눈앞에서 그리고 먼 곳에서 사라져 갔다.

순간, 정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저렇게 불에 타고 난 뒤에는 하얀재 밖에 없지않은가. 영혼이 있는지 지옥으로 천당으로 가는지, 환생을 하는지, 극락으로 가는지 그것은 산 사람이 직접가서 확인하고 다시 알려주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는 없지 않는가. 죽은 뒤에는 저렇게 재가 되거나 흙이 될 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뼈져리게 가슴에 와닿았다.

(아!! 가죽도 남기지 못하는 비참한 인간이여!!)

네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 그곳에서도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진중함과 달리 원숭이들은 그들만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자 원숭이

<달려라 자전거>는 2006년 6월부터 2007년 9월까지 432일동안 유라시아를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올리는 글은 그 때 당시에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지금의 저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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